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1 운동 (문단 편집) == 3.1 운동에 대한 왜곡 및 논란 == > 우리는 과거에 위대한 조상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 옛날의 역사를 더듬을 필요조차 없이, '''49년 전,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의 조상들은, 우리의 선조들은, 맨주먹으로 침략자와 대결해서 싸웠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여건을 기미년 당시와 비교를 한다면, 천지지차(天地之差)[* 사정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사자성어.]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피로써 싸워서 물려준 이 나라를, 우리의 손으로써 지키고, 건설을 해서, 위대한 조국을 또다시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바로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 ------ > - 대통령 [[박정희]], 1968년 3.1절 기념 행사 연설에서. [[https://www.ehistory.go.kr/page/view/movie.jsp?srcgbn=KV&mediaid=2458&mediadtl=9355&gbn=DT|10분 36초부터]] [[극우]] 일각에서 부정하는 것과 달리 이미 50년 전에도 대한민국의 역사적 근간은 3.1 운동에 기반한다는 의식이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영상 자료다. 박정희 역시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3.1 운동에 대한 왜곡성 주장은 끊이지 않고 있다. 앞서 이야기하였듯 당장 3.1 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응은 이 운동을 [[폭동]]이나 소요사태 등으로 폄훼하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이나 북한 등에서 정치적 입지를 위한 왜곡 주장을 펴나가기도 하였으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에서도 3.1 운동을 비하하는 주장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은 때로는 자국 내지는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따른 것이지만 때로는 역사에 대한 무지 또는 [[자국 혐오]]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 [[북한]]에서는 기본적으로 3.1 운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는 3.1 운동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민족 대표 33인의 출신이 중상층 이상의 부르주아 지식인과 종교인이라는 점, [[조선로동당]] 같은 혁명적 주체가 성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산발적으로 운동이 벌어지다 실패한 점, 이후에 세워질 북한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규정해 [[마르크스주의]] 역사발전단계론적 도식에 끼워맞추기 위해 내려진 해석으로 보인다. 또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평양시]]의 3.1 운동의 주역 중 하나였다거나 [[http://m.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4655|#]] 당시 7살에 불과했던 김일성이 만세 운동에 참가했다는 [[https://www.rfa.org/korean/commentary/lankov/alcu-03022023104937.html|역사 왜곡을 저지르기도 한다.]] 정작 김형직은 3.1 운동 당시에 [[중강군|중강진]]에 있어서 평양에서 열린 3.1 운동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https://blog.naver.com/minjune98/221268042051|#]] * 몇몇 [[친일]] 성향 학자들은 인구에 비하여 50~200여만 명의 참가자는 극히 소수이므로 별 것 아닌 일부의 준동으로 폄하하곤 한다. 그러나 대규모 반정부 시위나 혁명도 인구의 절대다수가 참여하는 경우는 드물며 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은 인구에 비해 소수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1910년대 한반도 인구는 대략 1,300만에서 1,700만 선으로 추정되므로 운동 참가자 수는 가장 적게 잡아도 전체 인구의 3%에 육박한다. 한국 현대사의 다른 큰 시위와 비교하자면 1987년 [[6월 항쟁]]의 최대 집회 참여자 수가 100만여 명, 2016년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의 집회 참여자 수가 주최측 추산 전국 232만이었으므로 당시 3.1 운동 참여자의 전 국민 대비 참여자 비율은 절대 작은 수준이라고 볼 수 없다. * 2017년 3월 역사강사 [[설민석]]이 저서와 강의를 통해 3.1운동 당시 민족운동가의 회합 장소였던 태화관을 '룸싸롱'으로 표현하거나 주옥경 열사를 '술집 마담'으로 비하하고 민족대표 33인의 대부분이 변절했다는 주장을 하여 [[역사 왜곡]] 논란이 일었는데 결국 일부 명예훼손이 인정되기도 하였다. [[설민석/논란 및 사건 사고|해당 문서]] 참조. * 2019년에는 일부 커뮤니티에서 3.1운동 당시의 격문 중 협박성 문구가 있었던 일부를 추려내어 '3.1운동은 협박에 의한 운동이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https://flashlight0503.tistory.com/1483|#1]], [[http://www.godemn.com/xe/free_board/662785|#2]] 이려한 주장은 [[윤서인]]이 2021년에 자신의 SNS에 업로드하면서 대두되었다. [[윤서인/논란 및 사건 사고/2020~2023년#s-3.5|해당 문서]] 참조. 이러한 주장은 우선 3.1 운동에 160만명이라는 규모의 대단위 인원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이는 단순히 협박성 격문 몇 가지만으로 이룰 수 없는 수치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단순 협박으로 인한 시위였다면 이후 총독부가 제2의 3.1운동을 막기 위해 학교 중심의 조선인 계몽에 경계심을 보이고 동아일보 같은 한글 신문 창간 허용 등 유화 정책을 편 것은 말이안 된다. 또 이러한 격문 중 일부는 친일 행위에 대한 경고의 의미 또는 참여 독려의 의미로서 해석되는 것일 뿐 이를 3.1운동의 자발성을 깎아내리는 어떠한 '이면'으로 서술하는 것은 왜곡에 해당한다.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1994601|#]] * 일부 [[극우]] 보수 인사들은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할 당시 [[이승만]]이 국내 지사들에게 이를 민족운동에 활용할 것을 독려했다는 증언 등에 근거해 '3.1운동은 이승만이 일으킨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으나 직접적으로 이승만과 3.1운동을 연결지을 만한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이승만이 3.1 운동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서재필]] 박사로부터 소식을 들은 3월 10일, 즉 3.1운동으로부터 9일이 지난 직후였다. [[https://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2|#]] * 일각에서는 북한이 주장하는 부르주아 혁명론과 유사하게 양반들이 자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3.1운동을 벌였다는 근거없는 폄하들도 있다. 그러나 신분제는 대한제국 때 법적으로는 철폐되었고 3.1운동에 참여한 시위대들의 계층이 다양했다는 것[*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3.1운동에서 조선왕조에게 탄압받은 평민들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내뇌망상을 펴내지만 실제 3.1운동에 참여하여 탄압받은 수감자들을 보면 평민들이 많았고 그 중에서는 농민, 짐꾼, 상인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는 것이 드러난다.[[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4148906|#]]],양반의 수가 적었던 평안도에서 시위가 잦았으며, 유림보다 기독교나 동학등의 종교인들이 많이 참여했다는 것, 3.1운동에서 왕정제와 신분제를 부정한 민주공화국을 천명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도리어 3.1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자제단이 친일 관료들과 지주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소작농과 머슴들을 동원하는 등 구시대적 기득권층의 모습을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